외국인들에게 불편한 국내 지하철, EMVCo 도입이 시급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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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왜 안돼?" IT 강국 한국의 지하철에서 외국인 친구가 당황하는 진짜 이유
깨끗하고, 빠르고, 심지어 객차 안에서 와이파이까지 터지는 서울 지하철. 외국인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K-인프라'의 상징이죠. 하지만 막상 명동역 개찰구 앞에서 "삑!"하는 거절음과 함께 당황하는 친구의 모습을 본 적 없으신가요? 뉴욕이나 런던에서는 지갑에서 꺼낸 신용카드를 찍고 바로 타는데, 왜 서울에서는 안 되는 걸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용어부터 간단히 정리해볼게요. 'EMVCo'와 'EMV', 둘 다 들어보셨을 수 있는데, 쉽게 말해 EMVCo는 비자, 마스터카드 같은 회사들이 모여 결제 기술의 국제 표준을 만드는 기관이고, EMV는 그 기관이 만든 기술 표준 자체를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컨택리스'나 '탭 결제'라고 부르는, 카드에 와이파이 모양 아이콘이 있는 결제 방식이 바로 이 EMV 표준 기술이죠.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 여행의 첫 관문인 대중교통에서부터 이 'EMV 미지원' 문제로 진땀을 빼고 있습니다. 해외 커뮤니티 레딧(Reddit)에는 비슷한 불만이 쏟아집니다. "교통카드를 충전하려면 현금이 필요한데, 왜 충전 기계는 5만 원권을 받지 않는 거죠?", "편의점에 갔더니 잔돈이 없다며 충전을 거부당했어요" 같은 생생한 경험담은 이 문제가 단순한 불편을 넘어 상당한 스트레스임을 보여줍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지하철이 가장 기본적인 결제 문턱에서 막히는 이 아이러니, 그 원인은 바로 '결제 방식'의 근본적인 차이에 있습니다.
핵심은 '오픈루프'와 '폐쇄루프': 우리만 쓰는 열쇠 vs 모두의 마스터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오픈루프(Open-Loop)'와 '폐쇄루프(Closed-Loop)' 시스템입니다.
- 폐쇄루프 (Closed-Loop): 우리가 쓰는 '티머니'처럼 특정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전용 카드를 사서 충전해야 하는 방식입니다. 놀이공원 자유이용권처럼, 그 안에서만 통용되는 '우리만의 열쇠' 같은 시스템이죠.
- 오픈루프 (Open-Loop): 런던, 뉴욕, 싱가포르 등 세계 주요 도시가 채택한 방식으로, 우리가 평소에 쓰는 비자, 마스터카드 등 EMV 비접촉 신용카드를 개찰구에 바로 찍고 타는 방식입니다. 전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마스터키' 같은 개념입니다.
서울의 대중교통은 바로 이 '폐쇄루프' 방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자국에서 쓰던 카드를 바로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다른 길을 갔을까? 과거의 성공이 만든 '고립'
그렇다면 한국은 왜 세계적인 흐름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 '티머니'의 대성공: 2000년대 초 도입된 티머니는 버스와 지하철 환승할인이라는 혁신을 가져오며 전국민의 교통카드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시스템이 너무나 성공적이었기에, 굳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다른 시스템으로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 '삼성페이'의 등판: 세계 대부분 국가가 상점에서 EMV 비접촉(NFC) 결제를 도입할 때, 한국 시장은 '삼성페이'가 주도했습니다. 삼성페이는 기존의 마그네틱 카드 리더기에서도 작동하는 독자 기술(MST)을 사용했기 때문에, 가게 주인들이 비싼 NFC 단말기로 교체할 필요가 없었죠.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EMV 비접촉 결제가 대중화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과거의 성공적인 선택이 역설적으로 현재의 발목을 잡는 '경로 의존성'에 빠진 셈입니다.
세계는 이미 '오픈루프' 시대: 일본마저 변하고 있다
한국이 독자적인 생태계에 머무는 동안, 세계 주요 도시들은 국경 없는 대중교통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 런던, 뉴욕: 공항에 내리자마자 자국 신용카드로 지하철을 탈 수 있고, 하루나 일주일 동안 쓴 금액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더 이상 요금이 부과되지 않는 '요금 상한제(Fare Capping)'까지 자동으로 적용해줍니다. 여행객은 복잡한 요금제를 공부할 필요 없이 가장 경제적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 일본: 우리와 비슷하게 '스이카(Suica)' 같은 강력한 교통카드가 있지만, 2025년 오사카 엑스포 등 국제 행사를 앞두고 관광객 편의를 위해 주요 도시 철도에 EMV 결제를 빠르게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제 도쿄, 오사카 등 주요 도시에서 외국인 관광객도 별도 카드 구매 없이 신용카드를 찍고 전철을 탈 수 있는 노선이 크게 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픈루프 시스템은 단순히 편리함을 넘어, 도시의 경쟁력이자 방문객을 환대하는 중요한 인프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서울의 다음 정거장: 또 다른 고립인가, 진정한 혁신인가?
서울시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드를 찍지 않아도 통과만 하면 결제되는 '태그리스(Tagless)' 시스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별도의 앱 설치가 필요한 방식이라면, 외국인 관광객의 근본적인 불편은 해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며칠 여행하자고 낯선 앱을 설치하고 카드 정보를 등록할 관광객은 많지 않을 테니까요.
가장 현실적인 해법은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입니다. 미래 기술인 '태그리스'를 개발하면서, 동시에 현재의 글로벌 표준인 'EMV 오픈루프' 결제를 도입하는 것이죠. 기존 티머니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외국인 관광객은 자신의 신용카드를 쓸 수 있도록 개찰구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입니다.
서울 지하철이 진정한 '세계 최고'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은, 더 복잡한 기술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저 세계인 누구나 자신의 지갑 속 카드 한 장으로 편안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 바로 그 '개방성'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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