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용어 터널링(Tunneling)을 쉽게 이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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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부를 빼돌리는 검은 통로, 터널링(Tunneling)

최근 뉴스 기사에서 'A기업, 터널링 의혹으로 조사'와 같은 헤드라인을 보신 적이 있나요? 터널링은 양자역학이나 컴퓨터 네트워크에서도 쓰이는 용어지만, 경제 기사에서 등장했다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기업 지배구조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터널링'은 마치 회사 지하에 비밀 터널을 뚫어 부(富)를 빼돌리는 행위를 묘사한 경제학 용어입니다.

터널링 개념 이미지

터널링의 의미: 누가, 어떻게, 왜?

기업에서의 터널링이란, 기업의 지배주주나 오너 일가가 소액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하면서 회사의 자산이나 이익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빼돌리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이 용어는 1990년대 체코의 국영기업이 민영화되는 과정에서 내부자들이 회사의 자산을 약탈하는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한국 기업 환경에서는 '일감 몰아주기'나 '사익편취'라는 단어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복잡한 지배구조를 가진 대기업 집단(재벌)에서 오너 일가의 부를 늘리거나 경영권을 편법으로 승계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 어떻게 구분할까?

말씀하신 대로, 모든 계열사 간의 거래나 가족 회사와의 거래를 무조건 '터널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그룹 운영에 반드시 필요하고, 외부 업체에 맡기는 것보다 효율적이거나 보안상 유리해서 계열사를 설립하고 거래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때 합법적인 '경영 판단'과 불법적인 '터널링(사익편취)'을 구분하는 핵심 기준은 '거래의 조건이 공정한가''회사의 이익에 부합하는가'입니다. 공정거래위원회나 법원이 부당지원행위(터널링)를 판단할 때 살펴보는 주요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정상가격 (Arm's Length Price): 거래 가격, 수수료율 등이 전혀 관련 없는 독립된 제3자와 거래할 때 적용했을 조건과 비교해서 현저하게 유리한지를 따집니다.
  • 사업상 필요성: 해당 거래가 정말로 사업상 꼭 필요한 일이었는지를 검토합니다. 실제로는 별 역할도 없는 회사를 중간에 끼워 넣어 '통행세'를 받게 했다면 터널링으로 볼 가능성이 큽니다.
  • 다른 사업자에 대한 차별: 오너 자녀의 회사에는 매우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다른 협력업체에는 불리한 조건을 강요하지 않았는지도 중요한 판단 기준입니다.
  • 결과적으로 회사에 이익이 되었는가: 해당 거래를 통해 오너 일가는 막대한 이익을 얻었지만, 정작 돈을 지불한 회사는 손해를 보거나 장기적인 경쟁력을 잃게 되었다면 배임의 소지가 커집니다.

결론적으로, 자녀가 운영하는 회사가 경쟁력 있는 조건으로 꼭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여 회사 전체의 이익에 기여했다면 정상적인 거래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저 '오너의 자녀가 운영한다'는 이유만으로 합리적 이유 없이 일감을 몰아주고 시장 가격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계약한다면, 이는 회사와 다른 주주들의 이익을 해치는 터널링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터널링의 교묘한 수법들

터널링은 단순히 회사 돈을 훔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합법적인 거래로 위장하여 교묘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외부에서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주요 수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일감 몰아주기: 그룹의 핵심 계열사가 IT, 물류, 광고, 건설 등 수익성 높은 사업을 오너 일가가 대주주인 다른 계열사에 몰아주는 방식입니다.
  • 통행세 거래: 실제로는 하는 일이 없는 오너 일가의 회사를 계열사 간 거래 중간에 끼워 넣어 수수료(통행세)를 챙기게 하는 방식입니다.
  • 자산 헐값 매각/고가 매입: 회사가 소유한 가치 있는 부동산이나 주식을 오너 일가에게 헐값에 팔거나, 반대로 오너 일가의 자산을 회사에 비싼 값에 되파는 직접적인 방식입니다.
  • 사업기회 유용: 회사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유망한 신사업을 오너 일가가 세운 개인 회사에 넘겨 미래의 이익을 가로채는 행위입니다.
  • 복잡한 자본거래: 전환사채(CB)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시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발행해 오너 자녀에게 배정하는 방법입니다. 최소한의 세금으로 막대한 부와 경영권을 넘겨주는 통로로 활용됩니다.

법적 책임과 실제 사례

터널링은 공정거래법상 '부당지원행위' 또는 '사익편취행위'로 규제받아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회사에 손해를 끼친 이사들은 형법상 '업무상 배임죄'로 형사 처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횡령죄가 아닌 배임죄가 적용되는 이유는, 터널링이 회사 자산을 직접 훔치는 행위가 아니라, 이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계약을 체결하는 등 '의사결정 권한'을 남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례 1: S사의 전환사채(CB) 저가 발행 사건

과거 S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였던 한 계열사는 주당 가치가 8만 원이 넘는 주식으로 전환될 수 있는 CB를 주당 7,700원이라는 헐값에 발행했습니다. 이 CB는 오너 일가의 자녀들에게 배정되었고, 이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그룹 전체의 경영권을 승계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사들은 업무상 배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대법원은 '회사 자체에 직접적인 재산 손실은 없었다'는 형식적 논리로 무죄 취지 판결을 내려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사례 2: K사의 일감 몰아주기 사건

K그룹의 물류 회사인 G사는 오너 부자가 설립한 후, 그룹 핵심 계열사들의 막대한 물류 업무를 독점적으로 수주하며 급성장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를 명백한 '부당지원행위'로 보고 수백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으며, 법원 역시 이 처분이 타당하다고 판결했습니다. 이 사건은 '일감 몰아주기'가 경영권 승계의 핵심 도구로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습니다.

터널링이 남기는 상처

터널링은 단순히 비윤리적인 행위를 넘어 우리 경제 전반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칩니다. 소액주주들의 부를 빼앗아 주식 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이는 한국 증시가 제 가치를 평가받지 못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또한,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여 중소기업의 성장을 가로막고 건강한 산업 생태계를 파괴합니다.

결국 터널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법적 규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이사회가 오너 일가가 아닌 전체 주주를 위해 일하도록 기업 내부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시장의 감시 기능을 활성화하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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