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 법안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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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한민국 국회에서 '스테이블코인' 법제화 논의가 뜨겁다. 2023년 제정된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1단계 입법이었다면, 현재 논의는 스테이블코인의 발행과 유통을 다루는 '2단계 입법'의 핵심 과제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디지털 자산을 규제하는 것을 넘어, 대한민국 디지털 금융의 미래 청사진을 그리는 중대한 작업이다.
정부의 '디지털 자산 허브' 공약과 맞물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주요국들이 이미 'GENIUS Act'나 'MiCA'와 같은 선도적인 규제 프레임워크를 마련한 상황에서, 한국 역시 더 이상 법제화를 미룰 수 없게 되었다.
왜 지금, 스테이블코인인가?
1단계 입법이었던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은 이용자 자산 보호와 불공정거래행위 규제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의 발행·유통과 같은 핵심적인 규율은 의도적으로 제외되었다. 당시 국회는 사안의 복잡성을 인지하고, 2단계 입법 과제로 스테이블코인 규제 체계를 조속히 마련할 것을 정부에 주문한 바 있다.
여기에 현 정부의 '글로벌 디지털자산 허브' 비전과 '원화 스테이블코인 활용방안 마련' 공약이 강력한 정치적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미 규제 밖에서 USD 스테이블코인 거래량이 폭증하는 등 시장의 현실적 수요가 확인된 점도 법제화의 시급성을 더하는 요인이다.
국회에 발의된 주요 법안들: 핵심 쟁점은?
현재 국회에는 민병덕, 안도걸, 김은혜, 이강일, 김현정 의원 등이 각각 대표 발의한 여러 법안이 경쟁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이 법안들은 세부 내용에서 차이를 보이며, 이는 곧 대한민국 디지털 금융의 미래를 설계하는 방향성에 대한 서로 다른 철학을 드러낸다. 핵심 쟁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쟁점 1: 누가 발행할 것인가? (은행 vs. 핀테크)
가장 뜨거운 쟁점은 발행 주체의 자격이다. 이는 '금융 안정'과 '기술 혁신'이라는 두 가치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 안정성 중심 (은행 중심): 안도걸, 김은혜 의원안 등은 금융 안정을 최우선으로 한다. 최소 자본금 요건을 50억 원으로 높게 설정하고, 은행에 준하는 엄격한 요건을 요구한다. 이는 사실상 자금력과 규제 대응 능력을 갖춘 시중 은행 등 대형 금융기관에만 발행을 허용하겠다는 취지다. 한국은행 역시 이러한 입장을 지지한다.
- 혁신 중심 (핀테크 허용): 반면 민병덕 의원안은 최소 자본금을 5억 원으로 파격적으로 낮춰 기술력을 갖춘 핀테크 스타트업의 진입을 허용하려 한다. 이강일 의원안은 그 중간인 10억 원을 제시했다. 이는 발행 주체를 은행으로만 제한할 경우, 혁신이 저해되고 시장이 독점될 것을 우려하는 시각이다.
쟁점 2: 이용자 자산은 어떻게 보호하나?
이용자 보호 방안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법안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의 신뢰는 전적으로 준비자산의 건전성과 투명성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 100% 이상 준비자산: 유통량의 100% 이상을 현금, 예금, 국채 등 안전자산으로 보유해야 한다.
- 자산 분리 및 신탁: 준비자산을 발행사의 고유자산과 명확히 분리하여 제3의 신탁기관에 보관해야 한다. 이는 발행사 파산 시에도 이용자의 자산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 투명한 공시 및 감사: 준비자산 내역을 정기적으로(예: 매월) 공시하고, 외부 회계법인의 감사를 받아 공개해야 한다.
- 상환권 보장: 이용자가 언제든지 스테이블코인을 액면가로 상환 요구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명시한다.
특히 김현정 의원안은 대규모 인출 사태('코인런') 발생 시 예금보험공사가 개입하여 유동성을 지원하는 공적 위기 관리 메커니즘을 제안한 점이 주목된다.
쟁점 3: 해외 스테이블코인은? (USDT, USDC)
이미 널리 유통 중인 테더(USDT)나 USDC 같은 해외 스테이블코인을 어떻게 규율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입장이 나뉜다.
- 엄격한 접근 (민병덕 의원안): 해외 발행사도 국내 법인을 설립하고 국내법에 따른 동일한 인가를 받도록 요구한다. (국민대우 원칙)
- 중도적 접근 (안도걸 의원안): 금융 당국의 엄격한 적격성 심사(규제 수준, 자산 안정성 등)를 통과한 경우에만 국내 상장을 허용한다. (동등성 평가)
- 관대한 접근 (김은혜 의원안): 기본적인 요건 충족 시 금융위에 등록만 하면 유통을 허용하여 시장 개방성을 높인다.
주요 법안 핵심 내용 비교
현재까지 발의된 주요 법안들의 핵심 규제 내용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 규제 항목 | 민병덕 의원안 (디지털자산기본법) |
안도걸 의원안 (가치안정형 디지털자산법) |
김은혜 의원안 (지급혁신법) |
이강일 의원안 (디지털자산 혁신법) |
김현정 의원안 (가치고정형 디지털자산법) |
|---|---|---|---|---|---|
| 법안 성격 | 포괄적 기본법 (MiCA 유사) | 스테이블코인 특화법 | 스테이블코인 특화법 | 포괄적 업권법 | 스테이블코인 특화법 |
| 발행 주체 자격 | 비은행(핀테크 등) 허용 | 은행 중심, 엄격한 요건 | 은행 중심, 엄격한 요건 | 비은행 참여 허용 | 은행 중심, 엄격한 요건 |
| 최소 자본금 요건 | 5억 원 | 50억 원 | 50억 원 | 10억 원 | 50억 원 (추정) |
| 준비자산 규제 | 100% 이상 안전자산 보유 | 100% 이상 안전자산 보유 | 100% 이상 안전자산 보유 | 100% 이상 안전자산 보유 | 100% 이상 안전자산 보유 |
| 해외 스테이블코인 | 국내 법인 설립 후 인가 (엄격) | 적격성 심사 후 상장 허용 (중도) | 금융위 등록 후 유통 (관대) | 금융위 요건 충족 시 허용 | 명시적 정보 부족 |
| 이자/수익 지급 | 명시적 금지 없음 | 명시적 금지 | 명시적 금지 없음 | 명시적 금지 없음 | 명시적 금지 없음 |
혁신과 안정, 두 거인의 충돌
스테이블코인 법제화의 이면에는 대한민국 금융의 미래를 둘러싼 두 가지 거대한 비전이 충돌하고 있다. 바로 기술 혁신을 추구하는 정부·산업계와 금융 안정을 수호하려는 한국은행의 입장 차이다.
한국은행의 우려: 통화 주권과 시스템 리스크
한국은행은 민간 스테이블코인, 특히 비은행 기관의 발행에 대해 일관되게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널리 통용될 경우, 기준금리 정책의 파급력이 약화되어 통화 정책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우려다. 또한, 특정 발행사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코인런'이 발생하면, 발행사가 준비자산인 국채를 시장에 급매도하면서 금융 시스템 전체에 리스크가 전이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에 한국은행은 민간 스테이블코인의 대안으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발행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정부와 산업계의 비전: 디지털 경제 영토 확장
반면 금융위원회와 산업계, 다수 의원들은 스테이블코인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바라본다. 블록체인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이 결제 수수료를 획기적으로 낮추고 실시간 정산을 가능하게 하는 '결제 혁명'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디지털 자산 허브'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필수적인 기반 인프라라고 주장한다. 특히, 현재의 '디지털 달러 패권'(USDT, USDC)에 맞서 경쟁력 있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육성하는 것이 곧 디지털 시대의 '경제 주권'을 확보하는 길이라는 전략적 관점을 제시한다.
세계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나? (미국과 EU의 사례)
한국의 입법 논의는 미국과 EU의 선례를 중요하게 참고하고 있다.
미국 'GENIUS Act': 지급결제 수단으로의 명확화
2025년 7월 제정된 미국의 GENIUS Act는 스테이블코인을 '허가된 지급결제 스테이블코인(PPSI)'으로 명명했다. 이 법의 가장 큰 특징은 스테이블코인 보유자에게 '이자나 수익 지급을 명시적으로 금지'한 점이다. 이는 스테이블코인의 성격을 투자 상품이 아닌 순수한 '지급결제 수단'으로 명확히 규정하여, 전통 은행 시스템과의 충돌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다. 또한, 준비금으로 미 국채 매입을 유도하여 달러 패권을 공고히 하려는 전략적 목표도 담고 있다.
유럽연합 'MiCA': 포괄적 규제와 '중요 스테이블코인'
EU의 MiCA는 암호자산 시장 전반을 아우르는 포괄적 기본법이다. 스테이블코인을 단일 법정화폐 연동 '전자화폐토큰(EMT)'과 자산 바스켓 연동 '자산준거토큰(ART)'으로 분류한다. 한 국가에서 인가받으면 EU 27개국 전체에서 영업 가능한 '패스포팅'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시가총액이 50억 유로를 넘는 등 시장 영향력이 큰 스테이블코인은 '중요 스테이블코인'으로 지정하여 유럽은행감독청(EBA)이 직접 감독하는 강력한 건전성 규제를 적용한다.
법제화가 가져올 미래: 기회와 위험
스테이블코인 제도화는 명확한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안고 있다.
기회: 결제 수수료 절감과 실시간 정산을 통한 결제 시스템 혁신, 저렴하고 빠른 국경 간 송금, 그리고 원화 기반 디파이(DeFi) 생태계의 활성화는 분명한 기회 요인이다.
위험: 반면, 은행 예금이 스테이블코인으로 대거 이동하며 은행의 자금중개 기능이 약화되는 '디스인터미디에이션(Disintermediation)'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코인런' 사태 발생 시 단기자금시장이 경색되는 등 시스템 리스크 전파 가능성도 존재한다. 자금세탁 등 불법 행위에 악용될 소지도 여전한 우려 사항이다.
새로운 디지털 금융 질서를 향해
대한민국은 지금 디지털 금융의 미래를 결정할 중대한 기로에 섰다. 국회에서 논의되는 다양한 법안들은 혁신과 안정이라는 두 가치 사이의 깊은 고뇌를 반영한다.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모습을 드러낼 최종 법안은 이 모든 가치를 조율하려는 복잡한 타협의 산물이 될 것이다.
단순히 해외 사례를 모방하는 것을 넘어, 한국의 금융 환경과 기술력에 최적화된 '한국형 모델'을 창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발행 주체의 범위, 이자 지급 허용 여부 등 앞으로 내려질 결정들이 국내 디지털 자산 시장의 향후 10년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신중하지만 과감한 정책 설계를 통해, 대한민국이 글로벌 디지털 금융 강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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