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발언 이후 수십조 증발 '블랙 먼데이', 엔비디아 26만 GPU 취소의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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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시장을 흔든 엔비디아 26만 GPU 공급 취소설의 진실

2025년 11월 초, 한국의 AI 및 반도체 산업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엔비디아 26만 개 GPU 공급 취소' 논란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취소되지 않았다.'** 이 사태는 법적 현실(Reality)과 정치적 수사(Rhetoric)를 구분하지 못했을 때 시장이 얼마나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불과 며칠 만에 수십조 원의 시가총액을 증발시킨 이 해프닝은 단순한 오보나 실언을 넘어, AI 시대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주었다. 이 글은 당시 시장을 휩쓴 공포의 실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GPU 공급 계약이 견고할 수밖에 없는 법적, 전략적 이유를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시장을 공포로 몰아넣은 '트럼프 발언'의 전말

사태의 발단은 2025년 10월 말,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발표된 엔비디아와 한국 정부 및 4대 기업(삼성전자, SK, 현대차, 네이버) 간의 26만 개 GPU 공급 파트너십이었다. 이는 한국의 'AI 공장(AI factories)' 비전을 위한 핵심적인 발표였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인 11월 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언론 인터뷰에서 "가장 진보된(The most advanced)" AI 칩(블랙웰)은 "미국 외의 어느 누구(anybody)"에게도 판매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anybody'라는 포괄적인 단어는 즉각 한국을 포함한 핵심 동맹국도 제외되는 것이 아니냐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2025년 11월 4일, 이 발언이 보도된 직후 한국 증시(KOSPI)는 '블랙 먼데이'를 맞았다.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가 5% 이상 급락하고 현대차, 네이버 등 계약 당사자들이 일제히 폭락했다. 26만 개의 GPU 공급이 무산될 경우, 한국의 AI 전환 로드맵 전체가 좌초될 수 있다는 구체적인 공포가 시장을 덮쳤다.

하지만 시장의 패닉은 11월 5일 백악관의 공식 해명으로 빠르게 진화되었다. 백악관 대변인은 대통령 발언의 대상이 'anybody'가 아닌 **'중국(China)'**임을 명확히 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역시 "현재 중국에 블랙웰을 선적할 계획이 없다"고 확인하며, 한국 기업들과의 26만 개 공급 계약이 유효함을 재확인했다.

대통령의 '말'과 '현실'은 왜 달랐나

이번 사태는 '정치적 수사'와 '법적 규제'를 명확히 구분해야 함을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애초에 "중국에 최첨단 칩을 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과정에서 나왔다.

엔비디아의 핵심 파트너사들은 이 발언이 나오자마자 대통령의 표현이 서툴렀을(loosely phrased) 뿐, 그 의도는 '중국'과 '북한, 이란' 등 미국의 적성국을 겨냥한 것이라 판단했다. 그들은 대통령의 인터뷰 발언이 미국 상무부(BIS)의 공식적인 규칙 제정을 거쳐야만 법적 효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발언의 정치적 맥락은 두 가지다. 첫째는 최첨단 기술의 미국 내 생산 및 독점을 강조하는 'America First' 정책의 연장선이며, 둘째는 APEC 회의 직후 중국과의 무역 협상에서 블랙웰 칩을 강력한 '협상 카드'로 사용하겠다는 의도다. 주식 시장은 이 발언을 '즉각적인 정책 변경'으로 받아들여 패닉에 빠졌지만, 업계는 이를 '정치적 수사'로 해석하고 동요하지 않았다.

한국이 '중국'과 다른 결정적인 이유

한국의 GPU 도입이 법적으로, 전략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미국은 현재 '블랙리스트'가 아닌 '화이트리스트' 기반의 강력한 수출 통제 체제를 운영 중이다.

이 체제 하에서 한국은 미국, 일본, 독일, 대만 등과 함께 'Tier 1' 동맹국, 즉 **'화이트리스트'**에 명시적으로 포함된다. 이는 A100, H100은 물론 최신 B200, GB200 칩에 대해서도 '보편적 허가(universal authorization)'를 받아 사실상 수출 통제에서 면제됨을 의미한다.

반면 중국은 D:5 국가 그룹, 군사 최종 사용자(MEU) 리스트 등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된다. 미국이 중국 시장을 위해 성능을 낮춰 H20 칩까지 수출을 금지한 것과, 한국에 26만 개를 공급하는 것은 이처럼 법적 근거 자체가 다르다.

칩 모델 중국 (D:5 국가) 수출 통제 한국 (Tier 1 동맹국) 수출 통제
A100 / H100 금지 (라이선스 필요) 제한 없음 (보편적 허가)
H20 (중국 특화) 금지 (라이선스 필요) (해당 없음)
B200 / GB200 (최첨단) 금지 제한 없음 (보편적 허가)

단순 판매를 넘어선 HBM '상호의존' 동맹

이번 계약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상호의존성'이다. 엔비디아의 블랙웰 GPU는 AI 연산을 위해 **HBM(고대역폭 메모리)**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 HBM의 세계 1위 공급자가 바로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다. 엔비디아는 차세대 HBM을 위해 이들과의 파트너십을 더욱 심화하고 있다. 즉, 엔비디아가 한국에 GPU를 팔지 못하면, 엔비디아 또한 한국에서 HBM을 원활히 공급받기 어려워지는, 상호 파트너십이 손상되는 구조다.

이 관계는 일방적인 판매(Selling)가 아니라, 엔비디아의 '주권형 AI' 전략과 한국의 'AI 공장' 비전이 결합된 기술 동맹이다. 엔비디아가 자사의 핵심 HBM 공급망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동맹국인 한국에 GPU 판매를 금지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불가능한 선택이다.

결론: GPU 계약은 견고하며, '진짜 위기'는 다른 곳에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엔비디아 GPU 26만 개 도입 계획은 취소되지 않았으며 법적, 전략적으로 견고하다. 11월 4일의 시장 공포는 '인식된 리스크(Perceived Risk)'가 '실질적 리스크(Real Risk)'를 압도한 해프닝이었다.

정작 한국 기업이 직면한 **'진짜 지정학적 리스크'**는 'GPU 수입'이 아닌 '중국 내 생산기지'에 있다. 미국 정부가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에 부여했던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지위를 박탈**한 것이 그 예다. 이는 이들 공장의 장비 반입을 막아 운영을 마비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조치다.

시장은 대통령의 정치적 수사에 과민 반응했지만, 정작 더 크고 실질적인 위협인 '중국 내 운영 리스크'는 간과했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대통령의 구두 발언(Rhetoric)이 아닌, 미국 상무부의 공식 고시(Regulation)와 한국 기업의 중국 내 생산기지에 대한 정책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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