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반도체 설계, AI가 정말 대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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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반도체 설계, AI가 정말 대체할 수 있을까?

느리지만 확실하게 다가오는 변화의 바람

요즘 AI가 그림도 그리고 코딩도 하는 세상이다. 반도체 분야라고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유독 '아날로그 반도체' 설계 분야만큼은 AI 도입이 더디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디지털 반도체는 이미 설계 자동화가 많이 이루어졌는데, 왜 아날로그 분야는 여전히 엔지니어의 '손맛'과 경험에 의존하고 있을까?

이 글에서는 아날로그 반도체 설계가 왜 AI에게 그토록 어려운 과제인지, 그리고 앞으로 언제쯤, 어떤 방식으로 변화가 일어날지 알기 쉽게 정리해 본다.


디지털은 레고 블록, 아날로그는 도자기 빚기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를 들어보자. 디지털 설계는 '레고 블록 조립'과 비슷하다. 0과 1이라는 명확한 규칙이 있고, 블록을 설명서대로 잘 끼우기만 하면 된다. 규칙이 딱 떨어지니 컴퓨터가 계산해서 최적의 조립 방법을 찾기가 쉽다.

반면 아날로그 설계는 '도자기 빚기'나 '요리'에 가깝다. 같은 재료(트랜지스터)를 써도 온도가 조금만 변하거나, 재료를 섞는 미세한 손길(레이아웃 배치)에 따라 결과물의 맛과 품질이 완전히 달라진다. 아주 미세한 전압 차이로도 성능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컴퓨터가 단순히 계산만으로 완벽한 답을 내놓기가 무척 까다롭다.

AI가 힘들어하는 3가지 이유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점들이 AI의 발목을 잡고 있을까? 크게 세 가지 벽이 존재한다.

그림(Layout)에 따라 성능이 널뛴다

회로도만 잘 그렸다고 끝이 아니다. 실제 반도체 칩 위에 회로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기생 성분'이라는 불청객이 생긴다. 선이 조금만 길어져도 저항이 생기고, 선들이 너무 가까우면 서로 신호를 방해한다. AI가 이걸 잘하려면 회로를 그리는 동시에 물리적인 방해 요소까지 완벽하게 예측해야 하는데, 이게 엄청나게 복잡한 계산을 필요로 한다.

공부할 교과서가 없다

AI가 똑똑해지려면 데이터를 먹고 자라야 한다. 챗GPT가 똑똑한 이유는 인터넷에 있는 수많은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도체 설계 도면은 회사들의 1급 기밀이다. 삼성전자나 TSMC 같은 기업들이 자신들의 핵심 기술인 설계 도면을 공개할 리 없다. 게다가 AI는 '실패한 데이터'를 보면서 "아,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를 배워야 하는데, 회사들은 성공한 도면만 남기고 실패한 기록은 다 버린다. 배울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

실습 비용이 너무 비싸다

알파고가 바둑을 잘 둔 건 수백만 번의 대국을 가상으로 둬봤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칩 하나를 실제로 만들어보는 데 몇 개월이 걸리고 비용도 수십억 원이 든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돌려보려 해도, 정밀한 아날로그 회로는 한 번 검증하는 데 몇 시간이 걸린다. AI가 수만 번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우기에는 시간도, 돈도 너무 많이 든다.

변화는 언제, 어떻게 올까?

어렵다고 해서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이미 단순한 반복 작업은 AI가 도와주고 있다. 자율주행차가 1단계부터 5단계까지 발전하듯, 반도체 설계 AI도 단계별로 우리 곁에 다가올 것이다.

단계 어떤 일을 AI가 할까? 예상 시기
도우미 단계 단순한 부품 배치나 크기 조절을 도와줌. 최종 확인은 사람이 함. 2025 ~ 2027
파트너 단계 사람이 큰 그림을 그리면, AI가 세부적인 블록들을 자동으로 완성함. 2028 ~ 2032
전문가 단계 복잡한 시스템도 AI가 척척 설계함. 사람은 관리 감독만 수행. 2033 ~ 2040
완전 자율 "이런 칩 만들어줘"라고 말하면 칩 설계도가 툭 튀어나옴. 2040 이후

엔지니어는 사라질까? 아니, 지휘자가 된다

많은 엔지니어들이 "내 일자리가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당분간 그럴 일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엔지니어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고 멋있어질 것이다.

예전에는 엔지니어가 트랜지스터 하나하나를 심고 배선을 연결하는 '기능공'에 가까웠다면, 앞으로는 AI라는 강력한 도구를 이용해 전체 시스템을 구상하는 '건축가'나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어야 한다. 귀찮고 반복적인 일은 AI에게 시키고, 사람은 더 창의적이고 중요한 결정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AI는 아날로그 엔지니어를 대체하는 적이 아니라, 복잡해지는 반도체 설계를 도와줄 든든한 파트너다. 기술의 장벽은 높지만, 그만큼 이 분야를 정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가치는 엄청나다. 변화를 두려워하기보다 AI를 어떻게 잘 부려먹을지 고민하는 엔지니어가 미래의 승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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