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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탈취로 신음하는 국내 펩리스 반도체. 반도체 설계도, 믿고 맡겼더니 경쟁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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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와 시공사의 위험한 동거
반도체 산업은 크게 두 가지 역할로 나뉜다. 건물의 설계도를 그리는 '팹리스(Fabless)'와 그 설계도를 받아 실제 건물을 짓는 '파운드리(Foundry)'다. 팹리스 기업은 공장을 짓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아껴 아이디어와 설계 기술에 집중하고, 파운드리는 생산에만 집중해 효율을 높이는 것이 이 분업의 핵심이다.
하지만 이 완벽해 보이는 협업 구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숨어 있다. 만약 내가 설계도를 맡긴 시공사가 몰래 내 도면을 베껴서 똑같은 건물을 더 싸게 짓고 분양까지 한다면 어떨까?
이것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다. 반도체 업계에서 중소 팹리스 기업들이 겪고 있는 냉혹한 현실이다. 특히 삼성전자나 인텔처럼 칩 설계와 생산을 모두 하는 종합반도체기업(IDM)과 거래할 때, 팹리스 기업들은 '기술 유출'이라는 공포와 마주하게 된다.
친구인가 적군인가, 프레너미의 딜레마
팹리스 기업이 칩을 생산하려면 반도체의 층별 구조와 회로 패턴이 담긴 가장 내밀한 원본 데이터인 'GDSII' 파일을 파운드리에 넘겨야 한다. 이것은 맛집이 프랜차이즈 본사에 비법 소스 레시피를 통째로 넘기는 것과 같다.
문제는 파운드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기업이 내 경쟁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나 인텔은 파운드리 사업부도 있지만, 스마트폰 두뇌(AP)나 컴퓨터 CPU를 직접 설계해서 파는 사업부도 가지고 있다. 물론 대기업들은 내부 부서 간에 정보가 오가지 못하도록 '방화벽'을 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온전히 믿는 팹리스 기업은 드물다.
"내 설계도가 저 방화벽 너머 경쟁 부서로 흘러들어가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실제로 애플이 아이폰 초기에 삼성 파운드리를 쓰다가 대만의 TSMC로 전량을 옮긴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이 '기술 탈취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삼성의 갤럭시가 아이폰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르면서, 애플은 더 이상 잠재적 적군에게 자신의 설계도를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제의 파트너가 오늘의 포식자로, 픽셀플러스 사례
국내 기업 중에도 뼈아픈 사례가 있다. 이미지 센서를 설계하는 '픽셀플러스'라는 기업이다. 한때 픽셀플러스는 삼성전자에 생산을 위탁하며 승승장구했고, 미국 나스닥에 상장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파트너였던 삼성전자가 자체적으로 이미지 센서 사업을 키우기로 결정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생산을 대행해주던 파트너가 갑자기 거대한 자본력을 가진 경쟁자로 돌변한 것이다. 결국 픽셀플러스는 시장 점유율을 잃고 상장 3년 만에 나스닥에서 퇴출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 시기 | 주요 사건 | 결과 |
|---|---|---|
| 성장기 | 나스닥 상장 (2005) | 삼성 파운드리 활용, 기술력 인정받음 |
| 갈등기 | 대기업의 시장 진입 | 파운드리 파트너가 직접 경쟁 제품 출시 |
| 위기 | 실적 악화 | 경쟁 심화로 나스닥 퇴출, 성장 동력 상실 |
이후 픽셀플러스는 "국내 대기업에 의존하면 성장할 수 없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고, 생산 라인을 대만의 TSMC 등으로 옮기며 재기에 성공했다. 이는 기술 보호를 위해 비용과 시간을 더 쓰더라도 '순수 파운드리(자체 제품이 없는 생산 전문 기업)'를 찾는 것이 생존 전략임을 보여준다.
해킹보다 무서운 합법적 인력 빼가기
기술을 훔치는 가장 확실하고도 합법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그 기술을 머릿속에 담고 있는 '사람'을 데려가는 것이다.
중소 팹리스 기업에게 핵심 엔지니어 한두 명의 이탈은 회사의 존립을 뒤흔드는 재앙이다. 하지만 대기업은 막강한 자금력과 브랜드 파워로 중소기업이 수년간 공들여 키운 인재를 손쉽게 영입한다. 때로는 특정 기술을 가진 팀 전체를 통째로 스카우트하기도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중국발 인력 사냥'이다. 중국 기업들이 고액 연봉으로 국내 대기업 인력을 빼가면, 대기업은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다시 중소기업의 경력직을 흡수한다. 이 먹이사슬의 맨 아래에 있는 중소 팹리스는 만성적인 인력난과 기술 유출의 이중고에 시달리게 된다.
품질 관리를 빙자한 기술 자료 요구
대기업 고객사가 부품을 구매하면서 기술 자료를 요구하는 방식도 교묘하다. "부품 승인을 위해 필요하다", "불량 원인을 분석해야 한다"며 상세한 회로도나 설계 데이터를 요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이렇게 넘어간 자료가 '이원화(Dual-sourcing)'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대기업 구매팀은 공급 안정과 단가 인하를 위해 독점 공급을 싫어한다. 그래서 기존 업체의 기술 자료를 다른 경쟁사나 자회사에 넘겨주며 "이 스펙과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겉으로는 품질 관리를 위한 절차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협력사의 R&D 성과를 무임승차하는 행위다.
신뢰가 없으면 생태계도 없다
최근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부 분사를 결정한 것이나, 팹리스 기업들이 비용을 더 지불하면서도 해외 파운드리를 찾는 현상은 모두 '신뢰'의 문제로 귀결된다. "내 기술이 안전하다"는 확신 없이는 진정한 협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반도체 생태계를 위해서는 기술 탈취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기술 자료를 제3의 기관에 맡기는 '기술 임치 제도' 등을 활성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대기업들이 중소 팹리스를 단순한 하청업체가 아닌, 함께 성장해야 할 파트너로 인식하는 태도의 변화가 시급하다. 기술은 훔칠 수 있어도, 혁신을 만들어내는 열정까지 훔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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