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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미중 패권 다툼 뉴스는 늘 무겁고 거창하지만, 연구소 모니터 앞에서 회로를 그리는 내게는 꽤나 피부에 닿는 현실이다.
양국의 기 싸움이 우리가 매일 쓰는 설계 툴의 라이선스 정책이나 미세 공정 데이터 접근 권한에까지 알게 모르게 파장을 일으키는 것을 종종 목격하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키우는 가장이자 경제 흐름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흔히 말하는 고래 싸움에 낀 새우라는 비관론에는 왠지 모를 의구심이 든다.
흔히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며 우리가 당장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벼랑 끝에 섰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현업의 생태계를 들여다보면 공급망을 두부 자르듯 단칼에 쪼개는 일은 밖에서 떠드는 것만큼 쉽게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칩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국경을 넘나드는 수많은 특허와 설계 자산, 장비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를 하루아침에 자국 중심으로 재편한다는 건 정치인들의 구호에 가깝게 들린다.
미국이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뿌리며 자국 내 공장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텅 빈 벌판에 거대한 공장을 지어 올린다고 당장 칩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끈적끈적하고 복잡한 상호 의존성 덕분에, 완전한 분리 전까지 우리에게는 숨을 고르고 다음 스텝을 고민할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는 것 아닐까.
거대한 자본과 거친 정치적 압박 속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진짜 무기는 무엇일까.
공정이 조금만 틀어져도 수율이 바닥을 치는 반도체 현장에서, 밤을 새워가며 원인을 분석하고 미세한 노이즈를 잡기 위해 치열하게 씨름하는 엔지니어들의 생태계는 돈만으로 단기간에 복제할 수 없다.
이는 중국이 막대한 자본을 쏟아붓고도 서방의 촘촘한 제재망 속에서 한계를 느끼는 이유다. 동시에 미국이 기를 쓰고 한국과 대만의 제조 시설을 끌어안으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패권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길은 지정학적 눈치 보기나 외줄 타기 외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수십 년간 쌓아 올린 끈질긴 공정 최적화 경험 그 자체에 있는 듯하다.
강대국들이 아무리 판을 흔들어도, 그들이 구상하는 첨단 산업의 밑그림을 현실의 실리콘 위로 완벽하게 구현해 내는 사람과 경험은 쉽게 대체되지 않기 때문이다.
거센 파도 속에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막대한 부를 챙기는 수혜자가 될지, 아니면 이리저리 치이는 피해자가 될지 섣불리 단언하기는 어렵다. 경제 전문가들이 말하는 거시적인 전망도 결국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이니까.
다만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세상이 둘로 쪼개지든 셋으로 나뉘든 양쪽 모두가 아쉬워할 만한 필수 불가결한 역량을 쥐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거대한 전자 회로 안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핵심 부품처럼, 미국이든 중국이든 우리의 칩과 설계 기술 없이는 자신들의 미래 생태계를 온전히 굴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 말이다.
매일 아침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모니터 앞을 지키며 전력 효율 1%를 높이기 위해 고민하는 수많은 직장인들의 평범하고 묵묵한 일상. 어쩌면 이것이 이 거대한 신냉전을 돌파하는 가장 날카롭고 현실적인 무기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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